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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 포위전'''또는 '''레닌그라드 봉쇄'''는 [[제2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 전선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공]]의 옛 이름인 [[레닌그라드공]]에서 발발한 [[나치 독일공]]의 장기간 군사 작전이다. 포위전은 1941년 9월 8일 마지막 육상 연결 통로가 끊어지면서 시작되었다. 비록 [[소련공|소비에트 연방공]]이 1943년 1월 18일 도시로 연결되는 작은 회랑 부분을 해방하지만, 완전한 포위전 종료는 전투 시작 872일 만인 1944년 1월 27일 끝났다. 이 전투는 역사상 가장 길었고 파괴적인 포위전이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은 사상자인 약 4백만명의 사상자를 입은 도시 전투로 꼽힌다.
== 배경 ==
[[레닌그라드공|레닌그라드]] [[레벤스라움|점령]]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3가지 목표 중 하나였고 북부 집단군의 주요 목표였다. 레닌그라드의 전략적 가치는 옛 [[러시아 제국공|러시아]] 수도로서의 정치적 중심지이자 [[러시아 혁명]]의 상징적인 장소였고, [[소련공|소련]] 발트 함대의 주요 거점으로 군사적 중요도가 높았으며 산업 시설과 무기 공장이 모인 대도시였다. 1939년부터 이 도시는 소련 산업 생산의 11%를 차지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레닌그라드공|레닌그라드]]를 확실히 [[레닌그라드 포위전|점령]]할 것이라 생각했고 이미 호텔 아스토리아에서 개최될 승리 행사 초대장을 이미 인쇄하고 있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아직 [[나치 독일공|나치 독일]]의 [[레닌그라드공|레닌그라드]]에 대한 궁극적인 계획은 여러 가지 이론이 있지만, [[소련공|소련]] 저널리스트 레프 베지멘스키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아돌프스부르크" 등으로 이름을 개칭하고 제너럴플랜 오스트에 따라 제국의 새로운 잉에르만란드 주의 주도가 되고, 완전히 도시의 시민을 죽일 것이 분명했다. 9월 29일 북부 집단군에게 보낸 명령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패배 이후, 이 큰 도시 중앙에 대한 지속적인 유지 여부는 관심이 없을 수 있다. [...] 도시를 포위한 이후, 인구 재배치와 공급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할 수 없고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항복 협상 요청은 거부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를 위한 전쟁에서, 우리는 이 매우 많은 도시 인구의 일부라도 존재에 관심을 가질 수 없다."
히틀러의 궁극적인 계획은 [[레닌그라드공|레닌그라드]] [[레닌그라드공|지역]]을 완전히 파괴하고 네바 강 북부의 영토는 [[핀란드공]]에게 주는 것이였다.
== 준비 ==
=== 독일군의 게획 ===
빌헬름 리터 폰 레프 하의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의 주 목표로 진출했다. 폰 레프의 계획은 도시로 이동하여 점령하는 것이었지만, 히틀러는 독일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가 페도르 폰 보크의 모스크바 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독일 4 기갑군을 후퇴시키고 폰 레프는 라도가 호 기슭에 도착하여 도시를 무한정 포위하기 시작했고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하의 핀란드 육군은 레닌그라드 동부의 스비리 강에서 대기하며 포위를 완료했다.
독일군은 남쪽에서 영토를 점령하는 동안, 핀란드군은 레닌그라드 북부에 있었다. 독일군과 핀란드군 모두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봉쇄 지역의 경계를 유지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도시와의 모든 통신망을 차단하고 음식 및 보급품을 운반하는 기선 통행을 막았다. 독일군은 시민에 대한 최고의 무기가 음식이 될 것이라고 계획했다. 독일 과학자들은 레닌그라드가 몇 주 후에 기아 상태에 접어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 핀란드 군의 참여 ===
8월부터 핀란드군은 1939년 당시의 핀란드-소련 국경으로 진출하며 레닌그라드 북부 20km까지 도달하여 도시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핀란드군은 동카렐리야, 라도가 호수 동부를 점령하며 동부에서 도시를 위협했다. 핀란드군은 겨울 전쟁 이전의 국경인 카렐리야 지협에 도달해 베루스트로프와 북 잉그니아의 소련군 돌출부를 제거했으며, 전선을 곧게 만들어 핀란드 만의 해안부터 라도가 호수까지 오래전부터 유지하던 국경을 따라서 전선이 이어졌고 레닌그라드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는 여전히 겨울 전쟁 전 국경에서 계속 자리 잡고 있었다. 소련의 주장에 따르면, 9월부터 핀란드군의 카렐리야 방어 사단에 대한 공격이 중단되었지만, 핀란드군은 1941년 8월 이전부터 목표 도달 이후에는 더 이상의 전진을 하지 않았으며, 이 중 일부는 겨울 전쟁 이전 국경 너머에 가 있기도 하였다. 각각의 목표를 달성한 이후, 핀란드는 전진을 중지하고 동칼렐리야로 병력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후 3년 동안 핀란드군은 이 선을 유지하며 레닌그라드 포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령부는 레닌그라드를 공격하는 독일의 공격 계획을 거부하고 스비리 강 남부로 전진하지 않은 채 9월 7일 동카렐리야를 점령했다(레닌그라드 동부 160 km). 남동쪽에서 독일군이 11월 8일 티흐빈을 점령했지만, 핀란드군이 있는 스비리 강까지 전진하지 못해 레닌그라드를 완전히 포위하는 데 실패했다. 12월 9일, 볼흐프 전선군의 반격으로 인해 티흐빈에서 볼호프 강으로 후퇴했다.
1941년 9월 6일, 독일 참모 총장 알프레트 요들은 헬싱키를 방문했다. 그의 목표는 만네르헤임이 공세를 재개하도록 설득시키는 것이었다. 1941년, 핀란드의 대통령 리스토 뤼티는 이 전쟁의 목적은 겨울 저쟁 기간 동안 핀란드가 잃은 영토를 다시 얻고 동부 영토를 합병하여 대핀란드를 만드는 것이라고 핀란드 의회에서 연설했다. 전쟁 이후, 리티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41년 8월 24일, 나는 만네르헤임 원수의 지휘본부에 갔다. 독일군은 계속 국경을 넘어와 레닌그라드를 계속 공격하라고 압박하고 있었다. 나는 레닌그라드 점령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며 우리가 거기게 참여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마네르하임과 국방장관 월든은 내 의견에 동의하고 독일군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 결과는 역설적인 상황이 오게 되었다. 독일군은 북부에서 레닌그라드로 접근할 수 없다..." 사실 독일군과 핀란드 육군은 1944년 1월까지 함께 포위망을 유지했지만, 핀란드군의 체계적인 포격 작전이나 폭격 작전이 없었다.
핀란드군의 위치는 레닌그라드 시내로부터 33~35 km 떨어진 곳에 위치했으며 핀란드 공격 위협은 도시 방어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 시점에서, 방어중인 전선군 사령관 마키안 포포프는 독일군이 카렐리야 지협에서 23군이 방어하기 위해 핀란드군 증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핀란드군의 배치 해제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네르헤임은 1939년 국경에 도달한 1941년 8월 31일 공격을 종료하였다. 포포프는 안심하였고, 9월 5일 독일군이 위치한 곳으로 2개 사단을 증원하였다.
이후, 핀란드군은 벨로스트로프와 키르야셀로의 포위망을 풀었고, 이는 부오크스키 강 남부와 해안 사이를 위협하는 위치였다. 핀란드 해안 여단의 총지휘관인 중장 파보 타르벨라와 대령 야르비넌은 독일 사령부에서 라도가 호수의 생명의 길을 차단해 주라는 제안을 받았다. 독일 사령부는 독일 사령부 하 아인사트크사탑 퓌레 오스트와 핀란드군, 이탈리아 12 공격차량중대를 포함한 K 해군 파견대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해군 병력은 1942년 여름과 가을 동안 보급로 공격 작전으로 이용했지만, 오직 물이 어는 기간 동안 경기계화 장비로 멀리 이동하여 공격해야 했고 전선의 변화로 인해 나중에는 이 군들을 재편성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었다.
=== 방어 작전 ===
레닌그라드 전선군(초기에는 레닌그라드 군사 지구)은 원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지휘했다. 이 전선군은 핀란드 만과 라도가 호수 사이의 북부 지역에 있던 23 군과 핀란드 만과 파블롭스크-므가의 서부 지역에 있던 48 군을 포함한다. 또한, 레닌그라드 요새 지역, 레닌그라드 주둔군, 발트 함대, 코포레 남부 풀코보 고지-술레츠크-콜피노 지역 작전 그룹도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