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공|대한민국 정부]]의 대응 ====
한때 이승만은 [[일본공|일본]] 야마구치현에[[야마구치현공|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공|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일본공|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공|일본 정부는정부]]는 [[야마구치현공|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본공|일본 정부에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 1950년 6월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공|미국]] 대사에게 문의해 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 한편, 미국은[[미국공|미국]]은 방어선이 무너질 때 [[대한민국공|대한민국 정부와정부]]와 군인 60만 명을 이동시켜 서사모아 제도 근처의 사바이섬이나 우폴루섬에 새로이 '[[통일 한국공|신한국]]'을 창설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고 한다.[[분류:한국]]
전쟁발발 15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인 7월 10일, 장면은 "38선은 의미를 상실했으며 [[대한민국공|전한국]]의 해방과 [[통일 한국공|통일]]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7월 13일, 이승만은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공|북한군]]의 행동은 38선을 제거시켜 주었고, 38선에 의한 [[대한민국공|분]][[북한공|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와 질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침략자를 격퇴하는 데 있어 [[대한민국공|한국군]]은 결코 38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이승만의 이 언명은 미국을 크게 놀라게 하여 딘 애치슨으로 하여금 주한 [[미국공|미국]]대사 존 무초에게 그러한 언명을 모든 것을 다해 어떻게든 막으라는 전문을 화급히 치도록 했다. [[미국공|미국]]은 38선에서 정지할 것이며, [[북한공|북한군]]을 그렇게 하였듯이, [[대한민국공|대한민국 국군]]을 그곳에서 막을 것이라는 [[미국공|미군]]의 성명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무초에 따르면, 그는 노 정객 이승만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민들은 전전부터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국부의 몰락 이후 깊은 절망에 빠져들어 우리는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을 저지할 것인가 걱정하고 있었다. 장면과 이승만의 언명 속에서 대한민국의 리더십이 6월 25일의 침략을,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을 시점부터 이미 통일의 호기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낙동강 방어전 ==
[[대전공|대전]]을 점령한 [[북한공|북한군]]은 다시 진로를 3분하여 일부는 서쪽으로 호남(湖南) 일대를 휩쓸고 [[마산공|마산]]으로 닿고, 일부는 경부선을 따라 [[대구공 (광역시)|대구]]로 향했으며, 또 일부는 동으로 포항에 육박했다. [[국제 연합공|유엔군]]은 총사령부하에 [[대한민국공|한국군]]까지 포함시켜 작전 계통을 통일하고 부대를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 전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아 반격을 개시할 태세를 완료한 때였다.
8월 7일 [[국제 연합공|유엔군]]은 [[마산공|마산지구]]에 [[미국공|미]] 제 25사단 · 34사단 기타 제5전투단 · 제3해병여단 등을 투입하여 [[부산공|부산]]을 목표로 육박하는 [[북한공|북한군]]에게 강력한 반격을 가하여 3일 동안에 60리를 진격, [[대한민국공|한국군]]의 채병덕소장이 전사한 [[하동공|하동지구]]를 탈환했다. 이것은 6월 25일 이후 [[국제 연합공|유엔군]]이 가한 최초의 본격적 반격이었다.
8월 13일에는 동부전선 포항에 돌입한 [[북한공|북한군]]을 [[대한민국공|한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이 대항하여 [[북한공|북한군]]의 주공격 지점으로서 낙동강 도하작전을 위해 10여 일을 두고 4개 사단의 병력을 투입, 인해전술로 몰려들었다. 이에 [[국제 연합공|유엔군]]은 8월 16일 하루 사이에 B29 99대를 출동시켜 [[북한공|북한군]]의 집결지인 왜관에다 도합 850톤에 달하는 수천개의 폭탄을 투하했으니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의 폭격기록이다. 그러나 [[북한공|북한군]]은 굽히지 않고 18일에는 대구 북방 13마일 지점까지 육박했다.
이 날 정부는 [[대구공 (광역시)|대구]]에서 [[부산공|부산]]으로 후퇴하고 [[대구공 (광역시)|대구]] 시민에게는 소개령을 내렸다. 최후의 결전을 각오한 [[대한민국공|한국군]] 제1사단은 [[영국공|영국군]] 보병 제27여단의 지원을 받아가며 북방으로 4Km를 반격, 뒤이어 이 날 [[미국공|미]] 제 24사단과 해병사단의 응원 출동이 있어 23일까지는 [[대구공 (광역시)|대구]] 북방의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켜 낙동강 이남 지역을 확보했다. 이 후 [[북한공|북한군]]은 [[대구공 (광역시)|대구]]를 피하여 동·서로 부대를 이동하더니, 최후의 결전인 제2차 협공작전을 기도했다. 서남지역 [[진주공|진주]] 방면에 [[북한공|북한군]]의 4개 보병사단(4·6·7·9)과 1개 전차연대(105사단 16연대)가 집결하고, 동부전선 포항 북방에 역시 4개 보병사단(5·8·12·15)과 1개 전차연대(105)가 집결하여 9월 3일 12시를 기하여 동시에 [[국제 연합공|유엔군]]을 공격해 왔다. 그러나 [[북한공|북한군]]은 이미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전투력이 기진하였으며, 훈련도 되지 않은 신병들을 보충 병력으로 편성한 상태였다.
=== 대구 후퇴와 다부동 전투 ===
8월까지 [[북한공|북한군]]은 [[대구공 (광역시)|대구]]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대한민국공|한국군]]과 [[미국공|미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교착상태에 빠졌고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었다. 이때 [[대한민국공|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은 다부동에서 [[북한공|북한군]]의 침공을 격퇴하고 8월 3일 [[국제 연합공|유엔군]]은 [[마산공|마산]]-왜관-[[영덕공|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쳤다.
===<no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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