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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또는 625 전쟁은 1950년 6월25일 새벽에 북한공대한민국공을 침공해서 발발한 전쟁이다.


발발과 서전 편집

북한군은 선제 타격 전략으로 불리는 전쟁 개시 작전계획에 따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옹진·개성·동두천·춘천 등지의 육로와 동해안을 돌아상륙하여 일제히 공격해 왔다. 북한군은 옹진 반도에 배치된 한국군을 공격했다. 그리고 개성,문산,의정부,춘천,강릉을 공격해 밀어붙였다.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받은 한국군은 전반적으로 북한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한국군은 즉각 주말 외출 중인 장병들을 전원 귀대시키고 후방 사단들로부터 5개 연대를 일선에 급파하였으나 26일에 옹진반도의 한국군은 할수 없이 철수 하였고,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의정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27일 저녁에는 서울 동북방 미아리 고지를 방어하는 한국군의 진중에 적이 침투하여 피차 적을 분간할 수 없는 육박전이 벌어졌다.이 혼란 중에 적 전차부대의 일부는 이미 서울 시내에 침입했으며, 정부는 대전으로 후퇴했다. 28일 3시 한강 인도교가 예정시간보다 앞서 폭파되고, 한강 이북의 한국군은 총퇴각을 감행해, 북한군 전투기가 상공을 나는 가운데 도하작전을 전개하여 전원 철수하니 28일에는 서울공이 적에게 함락 되었다. 한국 육군 본부는 수원공으로 후퇴하고 도강한 한국군 부대들은 통합재편되어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옹진 반도 전투 편집

북한군의 기습으로 악전고투하던 한국군은 좌전방의 제 1대대장이 전사한지 얼마후에 옹진지구의 주저항선이 돌파되었다. 이에 한국군은 지체하지 않고 예비군을 투입, 역습에 성공하였으나 우전방부대 또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듯 승세를 이용한 북한군한국군이 재편성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양원과 강령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국군의 작전지역은 동서로 양분되고 말았다.

개성·문산 전투 편집

개전 직전, 한국군청단시에서 개성시와 장단군 장남면 원당리까지 경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군중 제11연대는 사단 예비로서 수색에 주둔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포격에 이어 전차부대를 앞세워 전투를 개시하자 한국군중 제12연대는 초전에 분산되어 개풍군 남단의 한강 최하류에서 강을 건너 김포 반도와 문산리로 철수하였다. 제11연대(한국군)는 수색에서 문산으로 나아가, 임진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만났다. 제13연대(한국군)는 파주 파평산에서 북쪽을 향해 방어전을 펼쳤다. 다음날, 제1사단(북한군)의 동쪽에 위치한 제7사단(한국군)이 후퇴함으로써 서쪽이 취약해지게 되고, 이틈에 북한군의 일제공격에 밀려, 제11연대(한국군)는 임진강 방어선에서 물러났다. 또한 제13연대(한국군)도 파평산에서 북한군에 저항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북한군 제6사단은 김포와 서울 양천구까지 진출하였다.

의정부 전투 편집

의정부 포천 지역의 38선은 제7사단(한국군)의 예하 제1·9연대(한국군)와 포병, 공병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제1연대(한국군)는 동두천 정면(서쪽), 제9연대는 포천 정면(동쪽)에 배치되었다. 한편 북한군은 철원-연천-의정부를 거쳐 서울을 조기 점령하려는 계획하여 제1군단의 2개 사단이 의정부 정면을 집중 공격할 준바를 해두었다. 발발 당일, 영내에 대기하고 북한군 제3사단이 한국군 제9연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경계임무 중이었던 제9연대 제2대대는 북한군의 포격에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제2대대장의 전황 보고를 받은 제9연대장은 의정부읍내에 대기 중이던 제1 · 3대대로 하여금 포천 신북면 만세교 부근에서 진지를 구축하게 하고 방어전을 펼쳐 북한군은 잠시 주춤했으나, 북한군 제3사단 제7·9연대는 호국로를 따라 남침을 계속했다. 이에, 한국군중 제1 · 3대대는 끝내 흩어지고 다음날 의정부 등에서 집결했다. 한편, 제3연대(한국군)가 소흘읍 송우리 부근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이 역시 북한군의 기계화부대에 밀려서 소흘읍 이동교리 축석령으로 후퇴를 거듭했다. 이로써 의정부가 급박한 상황이 되었다.

춘천 전투 편집

북한군이 진공해 들어오는 것을 중동부전선인 춘천지역에서 한국군이 성공적으로 차단한 전투다. 이로써 북한군은 남한을 단기간 점령하는데 실패하였다.

강릉 전투 편집

북한군이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줄기를 이른바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11월부터 였으며 1950년 6월 중순에는 기관총으로 무장시킨 유격대를 오대산, 계방산으로 침투시켜 한국군의 반응을 살피는 동시에 전투 병력을의 분산을 유도하고 후방지역 교란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들 유격대는 아군의 조직적인 토벌작전으로 작전개시 5일 만에 유격대 55명이 사살되었고 이로 인하여 북한군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아군의 전투 병력을 분산시키는 목표는 달성하였던 것이다. 무장 유격대가 오대산 일대로 침투한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양양을 중심으로 한 38도 분계선 일대에 붉은 계급장을 단 수많은 병력이 나타나 공격대기 지점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중공군 제164사단 출신 한인 1만 명을 기간으로 1949년 8월에 나남에서 창설된 마상철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5사단 병력이었다.

그밖에도 간성에는 북한군 유격 부대 제766부대와 육전대인 제549 부대가 아군의 후방지역에 상륙할 준비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더욱이 양양 일대에서는 5월 초부터 감자나 호박을 말린 군용 식량과 마초(馬草)를 현물세 형식으로 거둬들여 상당한 양을 비축해 두기도 하였다.

이처럼 북한군이 마지막 남침 준비단계에 돌입한 6월 19일에는 38도 분계선 우단의 기사문리 해변을 따라 적 제5사단의 군사 1명이 귀순해 왔다. 18세 정도의 홍안 소년인 그 군사는 “지금 양양 일대에서 많은 북힌군이 집결하여 공격 준비를 하고 있다”라고 진술하였다. 같은 날 서림리에서도 북한군의 군사 1명이 투항하여 똑같은 내용의 첩보를 제공함으로써 국군 장병들을 긴장시켰으나, 상급부대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았다.

한국군 육군 본부의 대응 편집

당시 육군의 총지휘자는 채병덕 총참모장이었다. 개전 당일(6월 25일), 오후 2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채병덕은 “적의 전면공격은 아닌 것 같으며 이주하, 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으로 보인다”고 답했다. 채 참모총장은 육사교도대 생도 1기(262명) 및 2기(227명)를 포천 전투에 투입하라고 명령하였다.(6월 25일 오후) 채병덕은 다음날(6월 26일) 오후의 국무회의에서는 서울 사수를 공언하였고 명령만 있으면 나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서울의 상황 편집

이전부터 38선 부근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많이 놀라지 않았으나, 잠시 뒤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무슨 일인지 알 길은 없었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북한군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만 간단히 전하고 "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원대복귀하라"는 공지방송만 반복하고 있었다.

UP통신사의 서울주재 특파원 잭 제임스가 발송한 전문 기사 내용에 대하여 UP통신사의 도널드 곤잘레스는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국 섭외관 브래들리 코너스에게 확인을 요청하였다.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도 11시에 워싱턴D.C.에 전화를 걸어 “북한군한국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고 보고했고, 북한의 공격 상황을 국무부에 전달했다. 워싱턴 당국은 이 공식보고를 6월 24일 21시26분에 접수하였다. 전쟁이 발발하고 7시간26분 후였다.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국 차관보 딘 러스크는 동국 섭외관 브래들리 코너스로부터 전쟁 발발 사실을 보고받고,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에게 잭 제임스가 타전한 기사(전쟁 발발)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편, 전쟁 발발에 관한 주일 연합군 최고사령부 사령관 맥아더의 최초의 보고는 워싱턴 시간으로 1950년 6월 25일 5시, 침공이 개시된지 14시간 뒤에 육군성본부에 도착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의 요청에 따라 개전당일부터 합참의 지시도 받지 않고 한국군 지원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로 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을 통해, 서울 시민들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독려한 반면 그 자신은 방송 진행 중에 각료들과 함께 특별열차로 대전으로 피신하였다.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은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6월 27일 아침 6시에 서울중앙방송은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를 취소하라는 압력으로 취소 방송이 있었다.서울 시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북한군이 미아리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서울 시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6월 27일 저녁에 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북한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대한민국은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다. 6월 27일 보도연맹원에 대한 처형이 집행됐다. 학살은 주로 한국군(육,해,공군)과 서북청년회 등의 극우 폭력단체의 의해 자행되었으며, 미국 문서에서 미군정 미군 장교의 참관과 허가 최종 지시로 밝혀져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정부의 이 같은 실책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 나중에(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은 12년 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한강 철교의 폭파는 신성모국방장관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122]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고 북한군서울을 넘어 부산포항경상도 동해안, 대구울산경주영천과 그 이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서울시민 144만6천여 명 가운데 서울북한군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서울을 빠져나간 사람은 40만명이었다. 그 가운데 80%가 월남동포였고 나머지 20%인 8만명이 정부고관, 우익정객, 군인과 경찰의 가족, 자유주의자들로 추정된다.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본 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

북한군서울을 점령하고 전라도까지 위협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북한군의 서울 점령 편집

6월 28일 새벽 북한군의 탱크가 서울 중심부에서 목격되었다. 그러나, 바로 한강을 도하하지 않고 7월 3일까지 서울에 머물렀는데, 그 이유에 대해 여러 견해가 나뉘어 있다. 첫째 춘천 전투의 패전으로 인한 포위계획 실패, 둘째 도하장비 부족, 셋째 남로당 책임자인 박헌영이 전쟁 발발시 20만 명의 남로당원의 일제 봉기로 대한민국 자체가 조기 붕괴시키겠다고 호언 장담하며 이를 기다리자고 주장 하였다는 3가지 설이 있는데 여러 가지 견해 중 많은 학자들이 춘천전투에서의 국군의 방어가 인민군을 저지한 것이 서울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라는 이유로 보고있다. 이 2사단[127] 은 의정부에서 북한군에 패퇴하고 남은 병력이 지금의 동작대교에서 광나루까지 방어진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지연 작전 편집

남한 정부는 25일 북한군이 남침을 개시한 즉시로 주미 한국대사 장면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성에 사태의 절박성을 알렸고, 미국은 이날 오후 2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한국 문제에 대한 대책을 건의, 북한군의 즉각 철퇴 촉구를 결의케 했다. 27일 재개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다시 ‘공산의 무력 침략을 배제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보낼 것을 모든 유엔가입국에 권고하자’는 미국 대표의 제안을 7대 1로 가결했다. 이에 미국은 28일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으로 맥아더 전투사령부를 한국에 설치하고 해군과 공군을 우선 한국 전선에 파견했다. 뒤이어 29일에 영국네덜란드의 해군이 출동하고 30일까지 총 32개국이 한국을 원조하기로 결의했다. 7월 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영국프랑스의 공동 제안에 의해 ‘한국 출전 유엔군의 총사령부 설치 및 유엔기 사용’을 7대 0, 보류3(인도 · 이집트 · 유고)으로 가결, 그 관할권(管轄權)을 미국에 위임하는 동시에 미국으로 하여금 유엔군 총사령부 보고를 유엔에 제출케 하였다. 이때까지 소련은 그해 1월 13일 이래 중국 대표권 문제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을 거부하면서 다만 국외자의 입장에 서서 유엔군한국 파견 문제를 비난해 왔으나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 다수 국가의 ‘고귀한 집단적 양심의 표현(프랑스 대표 발언)’ 앞에 여지없이 패배당하고 할 수 없이 27일자로 유엔에 재참석할 것을 통고해 오기에 이르렀다. 유엔의 이와 같은 결의는 세계 역사상 국제정의에 입각한 최초의 유엔군을 탄생시킨 것으로서 국제평화의 수호를 위한 획기적인 거사였다. 7월 7일의 유엔 결의에 따라 미국은 마침내 일본 도쿄유엔군총사령부를 설치하고 맥아더 장군을 총사령관에 임명, 7월 14일 유엔기가 맥아더 장군에게 전달되고, 이 날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유엔군 총사령관 지휘 하에 편입시키겠다는 공식서한을 발송하자 맥아더 장군은 이를 즉히 응낙하여, 공산 침략군에 대항하여 전투태세는 완전 통일, 정비되었다.

한편 한국군은 6월 30일자로 삼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을 예비군 사령관으로 전임시키고, 새로 정일권 준장이 총참모장이 되어 한강 이남 방어선을 재정비했으나 경부선 가도를 따라 전차사단을 앞세우고 돌진하는 적 주력부대에게 수원을 빼앗기고 육군본부가 다시 남하했다. 7월 5일에는 유엔 결의에 따라 우선적으로 급파된 제24사단 21연대의 제1대대가 1개 포병대와 함께 오산 남방에서 최초로 공산을 맞아 싸웠으나 33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들어오는 적의 대부대에 완전 포위되어 많은 전사자를 내고 포위망을 탈출, 후퇴했다. 유엔군이 치른 최초의 전투가 이렇게 무참한 패배로 돌아가자 제24사단 전병력은 다시 금강 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7월 15일 밤 적은 금강을 건너 진격해 왔으며 20일 아침에는 대전 시내에 돌입, 3개 사단의 병력으로 집중공격을 가해 왔다. 여기서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몸소 적 전차에 수류탄을 던지며 용전하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7월 4일경, 주북한 소련 대사 스티코프가 김일성, 박헌영과 면담했다. 여기서, 김일성은 미군 상륙작전이 예상되므로 이에 대비하기 위해 무기와 탄약보급을 늘릴 필요가 있고 바실리예프 수석군사고문을 단장을 한 장교단을 전선사령부와 함께 서울에 상주하도록 허가를 요청하였다.

UN의 참전 결의편집

7월 1일 영국과 프랑스는 “유엔군사령부의 설치와 유엔 회원국들의 무력 원조를 미국 정부의 단일 지휘 아래 둔다”는 공동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7월 7일 7대1(기권3)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 · 벨기에 · 캐나다 · 콜롬비아 · 프랑스 · 그리스 왕국 · 에티오피아 제국 · 룩셈부르크 · 네덜란드 · 뉴질랜드 · 필리핀 · 태국 · 터키 · 영국 · 남아프리카 연방 등 16개국 군대로 유엔군이 편성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군의 전설로 불리는 명장 몽클라르 장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신의 계급을 스스로 중장에서 중령으로 강등시키고 대대장의 직함으로 프랑스 군을 이끌고 미군에 예속되어 참전하였으며 터키군의 영웅 타흐신 야즈즈 장군 역시 2개 여단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콜롬비아의 게릴라 용병부대가, 에티오피아는 셀라시에 황제의 특명에 의해 아프리카 원주민 병력, 정규군, 셀라시에 황제를 섬기던 친위대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대한민국을 도와주기 위해 참전했다. 이들 중 총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이들은 본국에서 창과 화살을 준비해오기도 했으며 미군에서 총을 지급해주기도 했다.

미국의 참전 편집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시에 의회가 선전포고를 결의한 것과는 달리, 한국 전쟁에 있어서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해외파병권에 의하여 참전을 결정했다. 트루먼이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6월 30일)에 따라, 맥아더는 주일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에게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라는 명령을 하달(6월 30일)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 육군 주일 제8군제24사단 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했다.(7월 1일) 이 부대는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 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로 알려졌다. 스미스 부대는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7월 5일, 오산 전투) 스미스 부대의 무참한 패배로 미국 지상군의 전선 투입이라는 위세만으로 북한군의 남침이 중단되기를 바랐던 더글러스 맥아더나 윌리엄 F. 딘의 한가닥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나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뒤를 이어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매슈 리지웨이는 그의 회고록에서 맥아더는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했으며 북한군 10개 정예사단 앞에 1개 대대를 투입한 것은 맥아더의 지나친 오만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스미스 부대의 참패를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미 지상군 참전에 예기치 않던 인민군이 미군 참전을 직접 목격하고 소련 전법에 따라 일단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미군은 10일을 벌었다는 것이다.[141] 이에 앞서 제24사단의 제2진인 34연대가 대전으로 진출하였다(7월 4일 저녁). 오산 전투와 같은 날(7월 5일), 평택 부근에서도 제34연대의 일부가 북한군과의 교전으로 총격제일성을 신호로 한 이래로 국도를 선혈로 물들이는 치열한 각축전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제21연대와 더불어 천안-전의-조치원을 연하는 선을 중심으로 일진일퇴케 된 결과, 7월 12일에 마침내 금강 남안쪽으로 물러서게 되었다.(평택-안성 전투)

스미스 부대의 패전 이후, 미군은 윌리엄 F. 딘 소장이 이끄는 육군 24사단을 대전에 투입했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적의 선봉을 꺾고, 한강까지 북상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겠다고 장담했으나, 육군 24사단도 T-34에 대적할 화기가 없었다. 대전을 공격하는 북한군은 군인들의 숫자도 많았고, 사기가 높아 T-34를 앞세워 육군 24사단을 공격했다. 계속된 북한군의 공격에 상당한 손실을 내던 대전 육군 24사단은 마침내 7월 20일 패주하고 말았다. 사방에서는 압도적인 숫자의 북한군이 밀려왔고, 지휘계통이 무너진 가운데 육군 24사단은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제24사단장인 윌리엄 F. 딘 소장은 함께 후퇴하던 부상병에게 먹일 물을 구하던 중 낭떠러지에서 실족하여 길을 잃었다가 북한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혔다. 한편, 대한민국은 대전을 빼앗기고 난 다음에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했다.

대한민국 정부의 대응 편집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본 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 1950년 6월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에게 문의해 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 한편, 미국은 방어선이 무너질 때 대한민국 정부와 군인 60만 명을 이동시켜 서사모아 제도 근처의 사바이섬이나 우폴루섬에 새로이 '신한국'을 창설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발발 15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인 7월 10일, 장면은 "38선은 의미를 상실했으며 전한국의 해방과 통일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7월 13일, 이승만은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군의 행동은 38선을 제거시켜 주었고, 38선에 의한 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와 질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침략자를 격퇴하는 데 있어 한국군은 결코 38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이승만의 이 언명은 미국을 크게 놀라게 하여 딘 애치슨으로 하여금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에게 그러한 언명을 모든 것을 다해 어떻게든 막으라는 전문을 화급히 치도록 했다. 미국은 38선에서 정지할 것이며, 북한군을 그렇게 하였듯이, 대한민국 국군을 그곳에서 막을 것이라는 미군의 성명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무초에 따르면, 그는 노 정객 이승만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민들은 전전부터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국부의 몰락 이후 깊은 절망에 빠져들어 우리는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을 저지할 것인가 걱정하고 있었다. 장면과 이승만의 언명 속에서 대한민국의 리더십이 6월 25일의 침략을,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을 시점부터 이미 통일의 호기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낙동강 방어전 편집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은 다시 진로를 3분하여 일부는 서쪽으로 호남 일대를 휩쓸고 마산으로 닿고, 일부는 경부선을 따라 대구로 향했으며, 또 일부는 동으로 포항에 육박했다. 유엔군은 총사령부하에 한국군까지 포함시켜 작전 계통을 통일하고 부대를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 전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아 반격을 개시할 태세를 완료한 때였다.

8월 7일 유엔군마산지구 제 25사단 · 34사단 기타 제5전투단 · 제3해병여단 등을 투입하여 부산을 목표로 육박하는 북한군에게 강력한 반격을 가하여 3일 동안에 60리를 진격, 한국군의 채병덕소장이 전사한 하동지구를 탈환했다. 이것은 6월 25일 이후 유엔군이 가한 최초의 본격적 반격이었다.

8월 13일에는 동부전선 포항에 돌입한 북한군한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이 대항하여 북한군의 주공격 지점으로서 낙동강 도하작전을 위해 10여 일을 두고 4개 사단의 병력을 투입, 인해전술로 몰려들었다. 이에 유엔군은 8월 16일 하루 사이에 B29 99대를 출동시켜 북한군의 집결지인 왜관에다 도합 850톤에 달하는 수천개의 폭탄을 투하했으니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의 폭격기록이다. 그러나 북한군은 굽히지 않고 18일에는 대구 북방 13마일 지점까지 육박했다.

이 날 정부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후퇴하고 대구 시민에게는 소개령을 내렸다. 최후의 결전을 각오한 한국군 제1사단은 영국군 보병 제27여단의 지원을 받아가며 북방으로 4Km를 반격, 뒤이어 이 날 제 24사단과 해병사단의 응원 출동이 있어 23일까지는 대구 북방의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켜 낙동강 이남 지역을 확보했다. 이 후 북한군대구를 피하여 동·서로 부대를 이동하더니, 최후의 결전인 제2차 협공작전을 기도했다. 서남지역 진주 방면에 북한군의 4개 보병사단(4·6·7·9)과 1개 전차연대(105사단 16연대)가 집결하고, 동부전선 포항 북방에 역시 4개 보병사단(5·8·12·15)과 1개 전차연대(105)가 집결하여 9월 3일 12시를 기하여 동시에 유엔군을 공격해 왔다. 그러나 북한군은 이미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전투력이 기진하였으며, 훈련도 되지 않은 신병들을 보충 병력으로 편성한 상태였다.

대구 후퇴와 다부동 전투 편집

8월까지 북한군은 대구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한국군미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교착상태에 빠졌고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었다. 이때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은 다부동에서 북한군의 침공을 격퇴하고 8월 3일 유엔군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쳤다.

UN군의 총반격편집

유엔군이 육전에서 전과를 올리기까지는 공군의 지원폭격이 크게 주효하였으니 유엔 공군은 이미 개전 20일 만에 제공권을 장악, B29, B26 등 중폭격기는 적 후방의 교통로를 파괴하는 한편 평양·진남포·함흥·성진·청진·나남 등지의 군수품 공장을 완전히 파괴했다. 세이버 제트기·F51 전투기·영국기·호주기 등이 전선을 주 공격목표로 삼고 각 방면으로 공습작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해군도 개전 직후부터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나 지상작전이 후퇴를 거듭하므로 큰 활약을 못 하고 있던 중, 낙동강 전선에서 육군의 반격이 개시되자 전격적 북상을 기도하는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9월 13일 인천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이 작전의 해군 사령관은 해군 소장 도일로서, 동원된 군함은 한국 15척, 미국 226척, 영국 12척, 캐나다 3척, 오스트레일리아 2척, 뉴질랜드 2척, 프랑스 1척, 도합 261척이었다. 13일부터 2일 간에 걸쳐 맹렬한 함포 사격을 가한 후 15일 새벽 마침내 유엔군한국군 해병대가 맥아더 장군 지휘로 인천에 상륙,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김일성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이 있자 소위 민족보위상인 최용건을 서울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약 2만의 병력으로 최후 저항을 시도했으나 20일에 유엔군 수색대는 이미 한강을 건너 서울에 침투했고, 23일에는 한국군해병대와 미 제1해병사단이 서울 서북방의 안산을 점령하고 다음 날 마포로 도하하여 시내로 돌입했으며, 25일에는 관악산 방면으로부터 한국군 제17연대와 미 제7사단이 한강을 도하하여 남방으로부터 시내로 돌입, 협공으로 맹격을 가했다. 북한군은 결사적 항거로 시가전을 기도하였으나 병력의 대부분이 섬멸되어 서울에서 퇴각하니, 9월 28일 역사적인 서울 탈환이 이루어져 중앙청 첨탑에 다시 태극기가 올랐다.이 서울 탈환작전은 남한지역 전투의 최종적 결판이 되었으니, 서울을 완전 탈환한 유엔군은 다시 수원 방면으로 남하하여 적의 배후를 찔렀으며, 중부와 동부전선에서도 무제한 북진공세를 취하니 30일에 벌써 국군 제30사단은 동해안을 전격적으로 북상하여 38선 접경 인악리에 이르렀다. 이에 38선 이남의 공산군은 사실상 퇴로 마저 끊긴 채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졌다. 9월 30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북한 공산군 총사령관 김일성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냈으나 김일성은 이를 거부하고 다만 남한지역에 있는 공산군의 전면 퇴각만을 명령했다. 따라서 같은 날 유엔군 사령부는 휘하 전장병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것을 명령했고, 북한군 부대들은 태백산맥을 유일의 퇴로로 이용하여 후퇴했으며 나머지 일부는 지리산 · 대덕산·회문산 일대에 포위된 채 유격전을 기도하게 되었다. 10월 1일 오전 11시 45분 국군 제3사단은 이종찬 대령 지휘하에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했으며 뒤이어 수도사단이 인제를 거쳐 북상하여 10월 10일 3사단과 함께 원산시내와 명사십리 비행장을 완전 점령했다. 중부전선에서는 국군 제7사단과 8사단이 화천·김화(金化)를 거쳐 북상, 18일에는 서부전선으로 북상한 미 제1군단과 만나 평양 남방 근교에 육박하고 19일 한국군 제1사단을 선두로 하여 평양을 완전 점령했다. 당시 평양을 지키고 있던 적군의 최인 중장은 신병으로 보충된 약 2만의 병력으로 방어태세를 취했으나 대패하여 청천강 이북으로 도주했다. 한편 서부전선에서는 10월 20일에 청천강 이남 숙천 일대에 미 제11공정사단의 약 4천명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 적의 후방을 공격하였으며, 국군 제6사단이 미 제24사단과 영국 여단의 서해안 진격과 보조를 같이하여 덕천·희천 등지를 거쳐 서북 국경의 중앙지점인 초산으로 진격, 26일 오후 5시 50분 6사단 제7연대 수색대가 압록강에 이르렀다. 11월 21일에는 중부로 진격한 국군 제7사단의 일부가 중부국경 혜산진에 도달했고, 동부전선의 수도사단과 3사단은 원산에서 다시 북진하여 10월 17일에 함흥, 22일에 북청, 28일에 성진을 점령했으며, 여기서 제3사단은 길주를 거쳐 백두산을 향해 합수로 진격하고 11월 25일 수도사단은 함경북도 도청 소재지 청진에 돌입했다. 이로써 국토의 전역이 거의 수복되고 통일이 목전에 다달았다.

인천 상륙 작전 편집

작전의 제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5시 시작된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 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어 제2단계로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국 1 해병사단이 주도한 인천반도 공격이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을 성공적으로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서울 수복 편집

그 후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9월 28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한국군은 이어서, 달아나는 인민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이어, 10월 26일에는 서부는 청천강 북부와 압록강의 초산에 이르렀고, 중부는 장진호까지 진격했으며, 동부는 압록강의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또한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한편, 김일성은 정부와 인민군을 미리 10월 9일에 북쪽으로 거의 모두 철수시킨 다음에 10월 12일부터 평양에서 철수했다.

북한, 중공의 반격 준비 편집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9월 30일경, 스티코프를 면담한 자리에서 김일성은 전황이 불리하기 때문에 소련의 원조를 요청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낼 의향임을 밝혔다.: “적군이 38선을 넘어 이북을 침공할 때에는 소련군의 출동이 절대 필요하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중국과 기타 공산주의국가들이 국제의용군을 조직해 출동하도록 원조해 주기 바란다.”10월 1일, 스탈린은 베이징주재 소련대사 로신에게 전문을 보내 다음 내용을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에게 지급 전달하도록 지시하였다.: “중국의용군을 보낼 수 있다면 빨리 5~6개 사단이라도 38선에 진출시켜야 할 것임.” 10 월 3일, 마오쩌둥는 이렇게 회답했다.: “처음에 우리는 적군이 38선을 넘을 시점에 중국 의용군 수개사단을 투입할 생각이었으나 지금은 당분간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된다. 북한은 유격전쟁으로 이행하면 될 것이다. 필요하다면 귀하의 휴양지에 저우언라이와 린뱌오를 보내도록 하겠다.” 이에 대한 주중 소련대사 로신의 견해는 이러했다: “마오쩌둥의 이 회답은 조선문제에 관한 중국의 태도가 바뀌었음을 보여주고 있음. 태도 변경의 원인은 아직 불명하다.” 김일성은 주북한 소련 대사 스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에게 북한이 어려움에 봉착하였음을 이유로 원조와 도움을 요청하였다. 김일성은 미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여 극동에서의 전략기지를 만들 의향인 것 같다고 밝혔다.[156] 11월 20일, 스탈린은 스티코프에게 비행사 양성에 관한 김일성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임을 통보토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11월 28일, 소련 각료회의는 소련 민간대학에 유학중인 북한 학생 2백명을 12월 5일까지 만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중공군 침략과 재반격 직전 편집

북한 공산군이 거의 섬멸 상태에 이르자 중공은 아무런 통고도 없이 한국전선에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4개군 약 50만의 병력으로 고원지대를 타고 몰려 내려왔다. 11월 24일 맥아더 장군이 직접 지휘에 나서 총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29일까지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하고 12월 1일부터는 동부전선에서도 철퇴를 개시했다. 12월 4일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 백만이 북한에 투입되었으며,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날 유엔군은 평양에서 완전 철수했고, 12월 23일 워커 중장이 일선 시찰 중 자동차 사고로 사망, 후임으로 릿지웨이 중장이 미 제8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는 동부전선의 아군 12만과 피난민 10만이 흥남에 모여 해상으로 철수했다. 이 흥남부두 철수작전을 방해하려고 몰려들다가 유엔군의 공습과 포격에 섬멸된 중공군 병력은 3개 사단에 달했다. 중공군의 유일한 전략은 인해전술이었다. 중공군이 일선을 담당하는 동안 북한 공산군도 5개 군단의 병력을 정비하여 다시 일선에 나타나 12월 말일까지 38선에 집결한 병력은 중공군 약 17만, 북한 공산군 약 6만 총 23만으로, 이날 밤 자정을 기해 일제히 38선을 넘어섰다. 1월 3일 영국군이 의정부에서 격전 끝에 철수했고, 1월 4일 서울이 두 번째로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고, 중공군과 북한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유엔군도 이때는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반면에 중공군과 북한군은 식량부족과 동상에 시달려 제10사단의 일부만이 태백산맥을 타고 경북 보현산까지 내려가고 다른 부대들은 진격이 부진했다. 1월 9일 유엔군은 비로소 재반격을 개시했으니 당시의 전선을 그려 보면 서쪽으로부터 오산-장호원-제천-영월-삼척을 연결하는 선이 된다. 이날 미 제2사단은 프랑스군과 네덜란드군을 포함한 병력으로 중공군에 대항하여 원주에서 열전 끝에 적을 격퇴시켰으며, 1월 15일 미 육군 참모총장 코린즈 장군이 내한, ‘중공군을 과대평가할 게 없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자 당일로 유엔군은 오산을 탈환했고, 1월 28일 중부전선의 횡성이 탈환되었다. 아군의 반격이 개시된 이후 2월 2일에 전사한 북한공산군 전선사령관 김책을 비롯해 10여 만의 전사자를 낸 적군은 할 수 없이 2월 7일부터 전면 퇴각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번의 반격 북진은 9·28 수복 때처럼 용이한 것은 아니었다. 적은 전 전선에 견고한 참호를 구축하고 있었으므로 일일이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겨우 진격이 가능했다. 이리하여 아군은 3월 2일에 비로소 한강을 넘어섰고, 14일에 국군 제1사단이 다시 서울에 진주할 수 있었다. 3월 24일 맥아더 장군은 38선 월경을 개시했고 동부전선은 4월 5일에 소양강을 건너 38선 이북의 수개 고지를 점령했다. 만주를 폭격하여 중공군의 기동을 분쇄하고 한반도의 완전 통일을 주장한 맥아더 장군이 4월 11일 유엔군 총사령관직을 퇴임하고 릿지웨이 장군이 신임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때 적은 소위 춘계대공세를 취하여 4월 23일 김화 남방의 아군 방위선을 집중적으로 돌파하여 28일에 춘천, 30일에 서울 북방 우이동까지 육박하였으나 결국 격퇴되고, 5월 16일 제2차 공세로 인제 지구에 남침하였으나 동원병력 11만 중 5만여 명의 살상자를 내고 6일 만에 격퇴되었다. 아군은 서부전선에서 6월 3일 연천지구로 진격하고, 중부전선에서는 6월 6일에 처음으로 평강에 대치하여 철의 삼각지대를 이루는 철원과 김화를 점령했고, 동부는 5월 30일에 고성까지 올라가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공의 참전과 1·4 후퇴 편집

대한민국 국군 및 UN군에 의한 무력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북한의 김일성은 불안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을 만났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은 미국이 북한을 이기면 머지않아 바로 중화인민공화국도 공격할 것이고,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타이완에서도 중화민국 주도의 중국 통일을 위해, 쳐들어올 거라는 추측으로 인해 결국,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미국과 싸워서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의 공산주의 혁명 정신을 지켜야 되는 목표를 삼았었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지원군이 사단급의 병력으로 전쟁에 개입하여 반격해 왔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은 내전이 갓 끝난 상황으로, 대부분의 인민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였으므로 참전자가 매우 많았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개입할 당시, 소련이 중국에 적은 양이나마 무기를 보내줬고, 소련군이 몰고 있는 전투기들도 중공 마크를 달고 공격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기록에 의하면, 병력을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병을 바탕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이 휴이대첩전로 공격해왔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주로 야간 이동을 하고, 요란한 악기 소리를 동원해 어둠을 틈 타 기습하는 등 지형지물을 정교하게 이용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예상치 못한 반격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은 12월 4일에 평양철수를 하고 이어 북한은 12월 6일에 수도 평양을 되찾았다. 한편, 12월 9일부터는 UN군이 원산을 철수하였고,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한국군 국민방위군 9만명이 간부의 횡령에 의해서 아사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한국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2월 이승만은 38선은 조선인민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한반도 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10여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3월 24일 이승만은 한국-만주 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휴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동부(강원도 쪽)에서 중국 인민해방군과 조선인민군이 강릉까지 밀고 내려오자, 유엔군은 이 전선을 지원 방어하였고, 좀 지나자, 유엔군은 전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결국, 중국 인민해방군, 조선 인민군이 뒤로 크게 밀려, 유엔군은 38선을 넘었고 유엔군은 방어선을 쳤다. 바로 이것이 지금의 휴전선이다. 하지만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소련이 전쟁에 부분적으로 참전하였다. 이제부터 한국전쟁은 국제전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소련군의 참전 편집

공식적으로는 한국전에 소련군은 참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7만여명이 참전한 것으로 밝혀졌고, 주력은 공군이었다. 참전 사실을 숨기기 위해 소련 공군기는 중공기처럼 도색을 바꾸고, 조종사들의 교신에도 러시아어 아닌 중국어를 쓰도록 강요받았다. 격추된 비행기 잔해가 미군 손에 들어가 참전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작전 구역도 상당히 제한되었다. 소련 공군기들은 미국 공군기와 여러 차례 공중전을 벌였기 때문에 미국도 소련의 참전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이를 비밀에 부쳤다. 소련의 참전 사실이 알려지면 미국내에서 확전의 여론이 대두될 것을 우려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비밀에 부쳤다 한다.

소련은 공군 외에도 군사 고문단 850 여명을 한국전에 파견했는데, 이들은 참전 사실을 숨기기 위해 민간 복장을 하였으며, 이중 200 여명이 전사했다고 당시 고문단의 일원이었던 게오르기 플로트니코프 예비역 대령이 증언하였다.

에티오피아의 참전 편집

에티오피아는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의 주도 하에 황제의 친위대를 포함하여 6,037명이 대한민국에 파견되어 123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당했다. 황제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1950년 8월부터 파병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소련을 중심으로 각국에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기존 정부를 대상으로 직접적 간접적 행동을 취하고 있었고 에티오피아도 예외는 아니였다. 따라서 에티오피아는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하여 미국과 서유럽, 일본을 중심축으로 하는 대공산주의 진영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셀라시에 황제에게 출국 신고를 마친 칵뉴 부대는 마침내 다음 날 오전 9시 아디스아바바 역에서 홍해의 지부티 항구를 향해 출발했다. 수많은 시민과 정부 고관들이 나와 부대원들을 환송했다.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은 1951년 4월 13일 아디스아바바 궁정에서 출국 신고식을 한 뒤 한국으로 떠났다. 지부티 항구에는 미군 수송선 제너럴 매크리아 호가 대기하고 있었다. 4월 16일 밤 칵뉴 부대원이 모두 승선하자 미군의 수송선은 닻을 올렸다.

제한 전선의 극동 편집

공산측은 결국 전세가 유리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6월 23일 소련의 유엔 대사 마리크로 하여금 한국전쟁의 정전을 제의해 오고 미국은 이에 호응함으로써 7월 8일 개성에서 정전회담 예비회담이 개최되고 10월 25일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겨 회담을 진행했다. 11월 28일에는 당시 전선을 임시 휴전선으로 채택하게 되어 한때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치열한 선전전을 수반하면서 여전히 전투는 계속되었다.한편 국군은 후방에서 9·28수복 때 지리산 일대의 산악으로 집결한 패잔 공비 소탕작전을 개시했다. 국군 수도관과 제7사단 및 전투경찰대 5개 연대는 이해 12월 2일부터 이듬해 3월 13일까지 4차에 걸친 공격을 가해 사살 7,147명, 포로 6,883명, 귀순 172명의 전과를 올려 일단 전면적 소탕을 끝냈다. 이외에도 1952년 여름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수차에 걸쳐 폭동이 일어난 5월 7일에는 포로대표와 담판을 하려던 수용소 소장 돗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는 등 소란이 일어났으나 6월 말경에는 완전히 질서를 회복했다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개시된 후부터 한국전쟁은 세계 전사상 처음보는 소위 제한공격이라는 전법을 채택하게 되었으니, 당사국인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산군과 유엔군은 함께 휴전의 성립을 희망하여 서로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투는 다만 진격을 감행하지 않을 뿐이지 거의 고정된 전선에서의 근거리 고지 쟁탈전은 치열하였으니, 한 능선·한 고지에서 퇴각과 탈환을 20여 회 이상 거듭하는 게 보통이었다. 1952년 8월부터 공산군은 후방의 병력과 장비를 보강하여 8월 5일 국군 수도사단이 지키는 김화 등 북방의 수도고지에 공격하여 왔다. 전례없이 포격을 강화한 적은 1일 평균 2만 발을 발사하여 인해전술로 육박해 8월 10일까지 6일 만에 7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갈리었다. 이러한 싸움을 9월 28일까지 계속하여 아군은 고지를 확보하니 29일에는 개전 이래 최대의 포격으로 4만 8천 발을 수도사단 지구에 퍼붓고 다시 방향을 돌려 백마고지에 공격해 왔다. 백마고지는 북한강 동쪽에 위치한 독립고지로서 철의 삼각지대 안의 교통로를 제압하는 전략상의 주요 고지다. 이 지대는 국군 제3사단·9사단 및 미 제2사단 등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10월 29일까지 1개월 사이에 25회 이상 고지의 주인이 바뀐 끝에 아군은 한걸음 진격하여 철마고지까지 점령했으며, 이 동안의 접전은 주로 백병전이었다. 한편 수도고지와 백마고지 사이에 있는 저격능선에서도 10월 초부터 맹렬한 적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 능선은 철의 삼각지대 동측 요충으로 적의 주요 진지인 오성산에 대치하는 지점이다. 이 지대는 국군 제2사단이 당하고 있었는데 4일 간 전투에 17회나 능선의 주인이 바뀌었으나 12월 21일 저격능선의 암석봉에 공격해 오는 적을 네 번이나 격퇴시키자 평온상태로 들어갔다. 이리하여 1953년 1월로 들어가 적은 산발적으로 소극적인 공격을 해 왔다. 그러나 이 해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한 후 4월 6일, 5개월 만에 휴전회담이 재개되고 11일에는 상이포로 교환협정이 조인되니 벌써 휴전 경계선의 결정을 토의하게 되었다. 휴전협정이 결정적으로 성립될 단계에 이르자 적군은 5월 초순부터 전전선에 걸쳐 공세를 취해 왔다. 그리하여 5월 12일 중동부 전선에 약 4만 5천의 병력을 투입하고 12시간 동안에 11만 8천 발의 포격을 가해 약 3km 후퇴했으며, 동부전선 단장능선, 서부전선 연천지방도 심한 공격을 받았다. 7월 16일부터 아군은 총공격을 개시, 휴전을 앞두고 전략상의 요지들을 확보하려던 적의 공격을 격퇴시키고, 20일까지는 앞서 잃었던 지역의 대부분을 탈환했다.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전협정이 정식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에 걸쳐 참담했던 한국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협정만이 조인되었고, 한반도에는 '제2의 38선'인 휴전선이 설정되어 민족분단의 비운을 또다시 맞이하게 되었다.

휴전협정 편집

이승만은 1951년 6월 9일 휴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휴전안을 거부하였다. 1951년 7월에 휴전 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 전쟁(휴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다. 1951년 9월 20일 이승만은 휴전 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장해제, 유엔 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 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 의제에 합의하였다.

한국 전쟁 중 2년 동안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중화인민공화국을 부담스러워한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협정을 추진하였다. 소련이 부분적으로 참전하자, 세계 여러나라들은 한국 전쟁이 머지않아 냉전체제와 한국의 통일을 위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거라는 가능성이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엔군과 중국 인민해방군은 얼른 이 한국전쟁을 중단하고, 휴전을 하기로 했었다. 미국은 소비에트 연방 및 중화인민공화국 측과 휴전을 논의한다. 1952년 3월 이승만은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철저한 반공주의를 지향하였던 이승만은 북진을 고집하며 휴전에 협조하지 않았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반격하였고 인민군을 압록강까지 북쪽으로 물리쳤을 때, 이승만은 한국을 분단시킬 여러 번의 휴전 제안에 동의하기를 거절하였고 이 때문에 연합국들로부터 인기를 잃게 되었다. 이승만은 유엔의 도움으로 통일된 한국의 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하였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방해가 되는 어떤 협정에도 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대응하여 좀 더 강력한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이 폭격을 하는데 망설이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곤 하였다.

그리고 또한,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죽음으로 휴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 1953년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 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1953년 5월 30일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친서에서 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였다.[177] 이승만은 휴전협정을 방해할 목적으로 수감된 포로 중 반공포로를 대규모로 석방했다.(1953년 6월 18일)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격분한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할 작전을 계획한다.

주로 개성과 금강산에 이르는 곳에서 전투가 계속되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소련을 통해 휴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측의 승인으로 휴전이 성립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은 휴전으로 매듭이 지어졌으며, 현재까지 그 효력이 이어지고 있다. 휴전협정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서울에 올라와서, 휴전협정 4조 60항은 협정 체결 후 3개월 안에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고위급 관계국 정치회의를 개최할 것을 쌍방 정부에 건의했다. 그 직후인 1953년 8월 28일 제7차 유엔 총회는 유엔 총회 결의 제711호를 통해 휴전협정을 인준하고, 협정 4조60항이 건의한 대로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정치회의가 개최되는 것을 환영한다고 선언했다.

6·25 전쟁 중 전투 들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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