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은 1950년 6월25일 새벽에 북한공이 대한민국공을 침공해서 발발한 전쟁이다.
발발과 서전
북한군은 선제 타격 전략으로 불리는 전쟁 개시 작전계획에 따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옹진·개성·동두천·춘천 등지의 육로와 동해안을 돌아상륙하여 일제히 공격해 왔다. 북한군은 옹진 반도에 배치된 한국군을 공격했다. 그리고 개성,문산,의정부,춘천,강릉을 공격해 밀어붙였다.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받은 한국군은 전반적으로 북한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한국군은 즉각 주말 외출 중인 장병들을 전원 귀대시키고 후방 사단들로부터 5개 연대를 일선에 급파하였으나 26일에 옹진반도의 한국군은 할수 없이 철수 하였고,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의정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27일 저녁에는 서울 동북방 미아리 고지를 방어하는 한국군의 진중에 적이 침투하여 피차 적을 분간할 수 없는 육박전이 벌어졌다.이 혼란 중에 적 전차부대의 일부는 이미 서울 시내에 침입했으며, 정부는 대전으로 후퇴했다. 28일 3시 한강 인도교가 예정시간보다 앞서 폭파되고, 한강 이북의 한국군은 총퇴각을 감행해, 북한군 전투기가 상공을 나는 가운데 도하작전을 전개하여 전원 철수하니 28일에는 서울공이 적에게 함락 되었다. 한국 육군 본부는 수원공으로 후퇴하고 도강한 한국군 부대들은 통합재편되어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옹진 반도 전투
북한군의 기습으로 악전고투하던 한국군은 좌전방의 제 1대대장이 전사한지 얼마후에 옹진지구의 주저항선이 돌파되었다. 이에 한국군은 지체하지 않고 예비군을 투입, 역습에 성공하였으나 우전방부대 또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듯 승세를 이용한 북한군은 한국군이 재편성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양원과 강령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국군의 작전지역은 동서로 양분되고 말았다.
개성·문산 전투
개전 직전, 한국군은 청단시에서 개성시와 장단군 장남면 원당리까지 경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군중 제11연대는 사단 예비로서 수색에 주둔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포격에 이어 전차부대를 앞세워 전투를 개시하자 한국군중 제12연대는 초전에 분산되어 개풍군 남단의 한강 최하류에서 강을 건너 김포 반도와 문산리로 철수하였다. 제11연대(한국군)는 수색에서 문산으로 나아가, 임진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만났다. 제13연대(한국군)는 파주 파평산에서 북쪽을 향해 방어전을 펼쳤다. 다음날, 제1사단(북한군)의 동쪽에 위치한 제7사단(한국군)이 후퇴함으로써 서쪽이 취약해지게 되고, 이틈에 북한군의 일제공격에 밀려, 제11연대(한국군)는 임진강 방어선에서 물러났다. 또한 제13연대(한국군)도 파평산에서 북한군에 저항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북한군 제6사단은 김포와 서울 양천구까지 진출하였다.